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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을 지남을 따라 무겁던 마음도 차차 홀가분하여지고 상구에게 대하여 확실히 심드렁하게 된 것을 분녀는 매정한 탓일까 하고도 생각하였다. 굴레를 벗은 것같이 일신이 개운하다. 매일 곳 없으며 책할 사람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마음이 활짝 열려져 엉뚱한 딴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어느날 저녁 느직하게 돼지물을 주고 우리에 의지하여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 문득 은근한 목소리에 주물트리고 돌아서니 삽작문 어귀에 사람의 꼴이 어뜩한다. 홀태양복을 입고 철잃은 맥고를 쓴 것이 갈데없는 만갑이다. 혹시 집안사람에게라도 들키면 하고 밖으로 손짓하며 뛰어갔다.
“동문밖까지 와줄 텐가. 성 밑에 기다리고 있을께."
만갑은 외면하여 돌아서며 다짜고짜로 부탁이다.
“의논할 일이 있어. 안 오면 낭패야."
대답할 여지도 없게 다짐하고는 얼굴도 똑똑히 보이지 않고 사람의 눈을 피하는 듯이 휙 가버린다. 어둠속에 달아나는 꼴이 어렴칙하다. 약바른 꼴이 믿음직은 하나 너무도 급작스러워서 분녀는 미심하게 뒷모양을 바라본다. 여편네 병이 위중한가.
방에 돌아와 망설이다가 행티가 이상한 까닭에 담보를 내서 가보기로 하였다. 물론 그에게는 그만큼 마음이 익은 까닭도 있었다.
동문을 나서니 벌판이 까마아득하고 늪이 우중충하다. 오리 밖 바다가 보이는지 마는지. 달 없는 그믐밤이 금시에 사람을 호릴 듯하다.
길 없는 둔덕으로 들어서 성곽 밑으로 다가서기가 섬칫하고 께름하다. 여우에게 홀리우는 것은 이런 밤일까. 여우보다는 사람에게 홀리우는 것이 그래도 낫겠지 하는 생각에 문득 납짝 붙은 만갑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차라리 반가왔다.
사내는 성큼 뛰어와 날쌔게 몸을 끌었다. 무서운 판에 분녀는 뿌듯한 힘이 믿음직하여 애써 겨르려고도 하지 않고 두 팔에 몸을 맡겨버렸다.
“분녀."
이름을 부를 뿐 다른 말도 없이 급작스리 허리를 조이더니 부락스럽게 밀친다.
“다짜고짜로 개처럼 무어야, 원."
분녀는 세부득 쓰러지면서 게정거리나 어기찬 얼굴이 입을 덮는다. 팔이 떨리며 몸짓이 어색하다.
“말이 소용 있나."
목소리에 분녀는 웅끗하였다.
“녀석 누구야."
소리를 지르나 입이 막히운다.
“만갑인 줄만 알었니. 어수룩하다."
“못된 것 각다귀."
손으로 뺨을 하나 올려쳤을 뿐 즉시 눌리워 꼼짝할 수도 없다.
“듣지 않을 듯해서 감쪽같이 만갑이로 변해보았다. 계집을 속이기란 여반장이야. 맥고 쓰고 홀태양복만 입으면 그만이니."
천수도 사내라 당할 수 없이 빡세다.
“딴은 만갑이와 좋긴 좋구나. 여기까지 나오는 것 보니 녀석도 여편네는 마저마저 거꾸러지는데 말 아니야. 물건을 낚시 삼아 거리의 계집애들 다 망쳐놓으니."
천수의 심청은 생각할수록 괘씸하였으나 지난 후에야 자취조차 없으니 할일 없는 노릇이다. 마음속에 담고 있을 뿐 호소할 곳도 없으며 물론 말할 곳도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날을 지날수록 괘씸한 마음은 차차 스러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