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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 - 김동인 - 이호준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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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 - 김동인
이하응의 사는 법
망할놈의 강아지
명색이 왕족의 한 사람
쌀 한 되를 청하여 볼 집
세도가에서의 수모
벽제 소리
김병학과의 술자리
변변치 않는 난초도 그리고
변변치 않은 옷
대왕대비께 보내는 세찬만은
당쟁의 기원
당쟁의 새끼치기
사도세자의 비극도
설 곳 없는 종친들
보위를 놓친 흥선군
네 손이 가장 크다
王者의 덕
이호준을 기다리며
비로소 떨어진 패떼기
궁실의 어른 종실의 가장
<한꺼번에 보기>

3. 이호준을 기다리며

가묘(家廟)의 다례(茶禮)가 끝난 뒤에 소년은 뜰로 나왔다. 꽤 추운 겨울날이로되 바깥에 단련된 소년에게는 그다지 영향 되지 않았다. 장난꾸러기의 소년 - 소년은 앞으로 돌아와서 새벽부터 벼르고 벼르던 연을 날렸다.

알맞추 부는 바람에 연은 소년의 손을 떠나서 둥실둥실 하늘로 올라갔다.

그 연이 꽤 높이 올라서 얼른 보면 알아보지 못하리만치 되었을 적에야 흥선은 사당에서 나왔다.

어두운 사당에서 나온 흥선은, 눈이 부신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연을 올리는 아들을 본 흥선은, 소년의 손에서 연 달린 줄을 따라서 하늘 높이 너울거리는 연을 잠시 보고 있다가 사랑으로 들어갔다.

막 정침으로 들어가려다가 흥선은 청지기의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어 번 발로 마루를 쿵쿵 울렸다. 그 소리에 응하여 청지기가 나왔다.

흥선은, 뒷짐을 지고 머리를 수그린 채 대령한 청지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잠시 서 있다가 그냥 휙 발을 도로 떼었다. 그러나 한 발짝 떼고 두 발짝 떼고 세 발짝 째 떼려다가, 그는 다시 고즈너기 돌아섰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향하여,

"좀 있다가 이 주부(李主簿)가 오시거든 내 침방으로 모셔라. 그밖에는 아무 놈…"

흥선은 허투루 나오려던 말을 얼른 도로 삼켰다.

"누가 오시든 간에 대감은 문안 가시고 안 계시다고 돌려보내라."

하였다. 그 '누구든'이란 말의 한계를 똑똑히 몰라서 청지기가 어릿거릴 때에 흥선은 거기 대하여,

"상감이 거둥하셨더라도 없다고 그러란 말이다."

하고는 휙 정침으로 향하여 사라져 버렸다.

이 주부라는 것은 이호준(李鎬俊)을 가리킴이었다.

일찍이 흥선이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로 있을 때에 호준은 흥선의 아래 주부(主簿)로 있었다. 호준의 사람됨이 강하고 직하고, 어디인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호담함이 있었으므로, 흥선은 그를 매우 총애한 것이었다.

아첨과 간교함으로써 모든 것을 꾸며 가는 이 세상에 있어서, 벼슬을 달가와하지 않고 자기의 절을 굽히지 않는 호준의 성격은, 불우 낙척의 경우에 있는 흥선에게 공명되는 점이 많았다. 그러기 때문에 호준을 매우 사랑하여 자기의 서(庶)딸과 호준의 아들 윤용(允用)과 약혼을 하여 사돈의 의를 맺었던 것이었다.

어제 - 섣달 그믐날 - 흥선은 부러 호준의 집까지 찾아가서 무슨 당부를 한 일이 있었다. 오늘 세배에 겸사하여 호준은 어제 당부한 일에 대한 회답을 가지고 올 것이었다.

흥선은 정침으로 들어왔지만 마음이 내려앉지 않는 듯이 안절부절 웃목 아랫목으로 거닐고 있었다.

아랫목 보료 위에까지 내려와서 그냥 주저앉을 듯이 어름거리다가는 도로 뒷짐을 지고 웃목을 향하여 거닐고, 웃목에서 주저하다가는 다시 아랫목으로 향하여 내려오고, 이렇듯 몹시 마음이 불안한 듯이 거닐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예사롭지를 못하였다. 어떤 일 때문에 한껏 긴장된 것이 분명하였다.

밖에 발소리가 나면 그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하였다. 내다보아서 그것이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면 청지기가 돌려보내기까지 그는 역한 눈으로 그 손을 흘기고 하였다.

비록 주책없는 인물이며 가난한 주정뱅이로되 명색이 종친인 그에게는, 몇 사람이 새해의 문안을 드리러 왔다. 그러나 흥선에게 영을 들은 청지기는 오는 사람마다 그냥 돌려보내고 하였다.

이렇게 한참을 정침에서 초조히 기다리다가 흥선은 침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침방으로 들어와서 귀찮은 듯이 보료 위에 번뜻 몸을 던진 흥선은, 문갑 서랍을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골패 쪽을 꺼내어 쫙 방바닥에 폈다. 그런 뒤에 익은 솜씨로 쪽을 저었다. 골패 쪽은 상쾌한 소리를 내며 저어졌다.

'패를 떼어 보자!'

투전꾼으로 잡기에도 상당한 수완을 가지고 있는 흥선은, 패를 떼는 데도 자기가 발명한 자기 독특의 패떼기의 법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좀체 떨어지지 않는 패였다. 한 쪽씩 한 쪽씩 죄어나가서 거의 떨어질 듯이 보이다가도 필경은 떨어지지 않고 하였다.

자기가 발명한 패떼기라, 골패 쪽을 잡을 때마다 그것을 떼어 보고 하였지만, 흥선의 아직껏의 경험으로는 그 패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직껏의 경험으로 좀체 떨어지지 않는 패인지라, 일종의 기괴한 기대를 가지고 그 패를 떼어보고 하는 것이었다.

오른손으로 골고루 패를 저은 뒤에 그는 그 가운데서 스물 다섯 쪽을 떼어서 다섯 줄로 지어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의 쪽들을 젖혀 보았다.

젖혀놓은 쪽들을 잠시 굽어보고 있다가 흥선은 손을 펴서 그 가운데 있는 준오를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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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 2008년 8월 04 월요일, 16: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