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브러리!

 

흙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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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3-2)
나는 원래 악마니까
누가 누구를 유혹해?
세상에 이야기가 많더라
처녀의 순결함이 부럽다
한숨과, 낯빛과, 자세에서
무슨 걱정이 생겼어?
망할 년들 같으니
뻔히 알면서 왜 속아
거짓에 껍데기 씌운 놈들
네 애인이 내게 보낸 연애 편지
그런 비겁하고 무책임한
남편과 세상을 속이려고
그저께 아침 차로 서울로
영원히 소멸할 수 없는 자취
무슨 말씀 없든?
그런 큰일낼 편지가
<한꺼번에 보기>

[소개]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민족운동이 침체에 빠지고 국내에서도 공산주의 사상이 풍미하던 시기에 농촌 계몽 운동과 인도주의를 뼈대로 씌어진 작품이다. 1932년 4월에서 1933년 9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으며 작자의 계몽사상이 가장 짙게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은 이 작품으로 끝을 맺고 이후부터는 현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범종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작품 세계라 할 수 있는 <사랑> <무명> <세조대왕> <원효대사> 등 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작가 소개]
이광수(李光洙, 1892-1950) : 한국의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사상가.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계몽주의, 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 한국 근대 정신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관은 전주.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 등.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유랑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소년 시절에는 동학 활동을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기에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으나 일제 말엽에는 친일 행각으로 논란을 빚었으며 이 때문에 해방 이후 반민특위 활동에 따른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서울에서 인민군에 납치돼 그 해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랑> <흙> 등 장편소설이 많으며 작품에는 초기에는 계몽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나 차츰 불교와 톨스토이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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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보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정선은 손으로 낯을 가리고 엎드렸다. 차마 그 다음에 쓴 글귀를 읽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마치 남편이 어젯밤 자기가 한 일을 다 보고 가서 자기를 책망하느라고 쓴 편지인 것 같았다.

편지를 다 보고나서 정선은 이불 위에 폭 엎드려버렸다. 그러나 이 때에 정선에게는 뉘우침보다도 무서움의 힘이 있었다.

‘내가 만일 정선을 배반하거든 정선은 칼로 내 심장을 찌르시오’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정선의 눈 앞에는 시퍼런 칼을 들고 선 숭의 모양이 보인 것이다.

바로 이 때다. 이 때에 유월이가,

“마님 잿골 서방님이 오셨어요.” 하였다.

“아직 안 일어났다고 그래!”

하고 고개도 들지 아니하고 화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유월이가 나가기도 전에,

“아직 안 일어났소?”

하고 반말지거리를 하며 영창을 홱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지 말아요… 나가요!”

하고 정선은 이불 위에 엎어진 채로 몸을 흔들며 부르짖었다.

갑진은 그런 소리는 들은체 만체,

“어, 이건 왜 이러오? 허기는 정선씨 그 포즈도 어여쁜데. 미인이란 아무렇게 해도 어여쁜 법이야. 아, 코대크를 가지고 올걸 그랬는걸. 얘, 유월아, 너는 나가! 왜 거기 버티고 섰어?”

하고 유월을 향하여 눈을 흘긴다.

“나가요! 왜 남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남의 방에 들어오시오? 어서 나가라면 나가시오!”

하고 정선은 눈물과 흥분으로 어룽어룽한 낯을 번쩍 뒤로 돌리면서 갑진을 노려보며 물어뜯기라도 할 듯이 화를 낸다.

갑진은 비로소 정선이가 울고 있는 것을 알고 참으로 성낸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의외로다 하는 듯이 잠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선의 심상지 아니한 양을 바라보고 섰더니,

“하하하하.”

하고 갑진은 무슨 크게 우스운 일이나 보는 듯이 껄껄 웃고는,

“오, 알았소. 예수교당에서 그 쑥들이 무에라 하는 양심이란 것이 발작했구려. 응, 옳지. 하느님의 딸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판이로구려. 어, 우리 정선씨 천당가겠는걸, 허지마는 천당에는 고이(연애)라는 것이 없다던걸. 모두 쑥들만 모여서 주여, 주여 하고 정선이 모양으로 물보다도 싱거운 눈물이나 짜고….”

하고 웃음 절반 말 절반으로 지절대는 것을 정선은,

“무엇이 어쩌고 어째요? 그런 말법 어디서 배웠소? 이 악마 같으니!”

하고 몸을 부르르 떤다.

“악마? 거, 좋은 말이오. 나는 원래 악마니까, 허지만 남편 있는 여편네가 서방질하는 것도 천사라고 쑥들은 아니하던 모양인데.”

하고 또 한번 갑진은 껄껄 웃는다.

유월이는 갑진이가 전에 없이 마님에게 버릇없이 구는 것을 보고 또 정선이가 분해서 치를 떠는 것을 보고,

“그게 다 무슨 말씀이셔요?”

하고 쇳소리 같은 소리를 빽 지르며 갑진을 흘겨본다. 유월이는 평소에 갑진이가 정선을 엿보고 추근추근하게 다니는 것이 절치부심(切齒腐心)하게 미웠었고, 더구나 유월이가 가장 미워하는 어멈이 갑진의 편이 되는 것이 미웠던 판이라 갑진을 칼로 찔러 죽이고도 싶었다.

“요년! 요 발칙한 년 같으니.”

하고 갑진은 주먹을 들어 유월을 위협하고,

“흥, 악마! 하룻밤 서방도 서방이거든 날더러 악마라고.”

하고 빈정대기를 계속한다.

 






“아이구 저런 악마가 - 저런 사람 잡아먹을 악마가.”

하고 정선은 말이 꺽꺽 막히며,

“저 악마가 나를 유혹해서 몸을 버려놓고는… 아니 저 악마가… 에잇… 저 악마가!”

하고 기색하려 한다.

“유혹? 아니 누가 누구를 유혹했단 말야?”

하고 갑진은 정선의 곁으로 한 걸음 대들며,

“제가 살려주오 하고 매달렸지, 누가 강○을 했단 말야, 웬말야?”

하는 것을, 유월이가 갑진의 뒤로 가서 그 외투 자락을 잡아끌며 우는 소리로,

“나가세요! 아이, 큰일나겠네, 나가세요!”

하고 매어달린다.

“요년은 왜 요 모양이야.”

하고 갑진은 유월의 머리 꽁지를 끌어 내어두른다. 유월이는 방바닥에 쓰러진다.

“아이구 저 뻔뻔한 악마가.”

하고 정선은 입으로 거품을 뿜으며,

“당신이 날더러 야구 구경 가자고 안했소? 구경하고 집으로 오려니까 저녁 먹으러 가자고 안했소? 저녁 먹고는 집으로 오려니까 택시로 바라다 주마고 안했소? 택시를 태워놓고는 한강까지 드라이브나 하자고 안했소? 한강 갔다가 내가 늦었으니 가얀다니까 좀더 가자고 안했소? 요렁조렁 오리 고을까지 끌고 가서는 이왕 왔으니 오류장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안했소? 내가 거기서 얼마나 싫다고 했소?

그러니까 한 시간만 있으면 인천서 오는 막차가 있으니, 자동차는 추우니 자동차는 돌려보내고 기차로 오자고 안했소? 그리고는 막차시간이 되었으니 정거장으로 내가 나가자고 암만 졸라도 듣지 아니하고 나를 꼭 붙들고 막차를 놓쳐버리게 아니했소?

그리고는 내가 앙탈을 하니까, 그러면 자동차를 부른다고 안했소? 자동차 오는 동안에 자동차에서는 추울 테니 위스키를 몇잔 먹자고 안했소? 그리구 내가 안 먹는다는 것을 억지로 먹여놓고는… 나를 취하게 해놓고는, 그리고는 이제 와서는 나를 유혹하지 아니했다고, 응 그러면 내가….”

하고 정선은 ‘아으 아으’ 하기만 하고 기색하여 쓰러진다. 갑진은 지금까지 부리던 호기도 어디 갔느냐 하는 듯이,

“유월아, 냉수 떠와, 냉수.”

하고 정선을 일으켜 안는다. 그리고 숨이 막히는 정선의 입에 제 입을 대어 거품 나온 것을 핥아먹고, 뺨을 비비고, 만지고, 젖을 만지고, 발을 만지고, 마치 귀여운 어린애나 만지는 듯이 갖은 짓을 다 한다. 그러다가 유월이와 어멈과 기타 하인들이 들어온 때에야 그 짓을 그친다.

이윽고 정선이 다시 정신을 차린 때에 정선은 주먹으로 갑진의 안경 쓴 상판을 갈기고 몸을 뿌리쳐 갑진의 품에서 나왔다. 갑진의 안경이 깨어지며, 그 깨어진 유리조각에 갑진의 양미간에 생채기가 나서 피가 조금 흐른다.

정선은 두 팔에 경련을 일으키며,

“나가아아!”

“나가! 나가!”

하고 책상 위의 책을 집어 갑진을 향하여 던졌다. 갑진은 몸을 비켜서 피하고, 그 책은 쌍창을 뚫고 마루로 나가 자빠졌다.

“오, 가마.”

하고 갑진은 모자를 들고 일어나며,

“허지마는, 네 뱃속에 내 자식이 들었는지 몰라. 그 애가 나거든 날 찾아라. 그 전에라도 보고 싶거든 만나주지.”

하고 나와버렸다.

갑진이가 대문 소리를 요란히 내고 나가버린 뒤에 정선은 정신없이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우는 유월이는 정선이의 머리에 베개를 베우고 이불로 정선을 덮어주었다. 정선은 그것도 모르는 듯하였다.





정선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 한술을 뜬 것은 오후 네 시가 넘어서였다.

정선은 그래도 밖에 나가는 단장을 할 정신은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본능으로였다. 머리도 빗고 분도 발랐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가 양복장을 열고 갈아입을 옷을 고르려 할 때에 어젯밤에 입었던 자주 저고리와 고동색 치마를 보고는 그것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정선은 양복을 입을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다 해서 그만두고 검정 세루 치마에 흰 저고리, 눈에 아니 뜨이는 옷을 입고, 게다가 검정 나단 두루마기를 꺼내 입었다. 옷을 입고 체경에 비추어볼 적에 자기의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의복의 아름다움이나 모두 허사요, 귀찮은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정선은 이 모양을 하고 집에서 나와서 정동 성공회 앞을 걸어서 다방골 현 ○○이라는 여의의 병원으로 향하였다.

성공회 교당 꼭대기에 선 십자가가 석양의 하늘에 파스텔로 그린 그림 모양으로 정선의 눈에 보였다. 정선이는 성공회 속에 사는, 검은 장삼 입고 흰 고깔 쓴 수녀들을 생각하였다. 그 싸늘하고 적막한 생활로 일생을 보내는 수녀들의 심정이 좀 알아지는 것 같이도 생각하였다. 그 수녀들도 다 자기와 같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 하였다.

'聖公會’라고 흰 글자로 크게 쓴 문패, 문 안으로 엿보이는 조용한 마당과 집들, 모두 죽음의 고요함을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저러한 속에서 찬미와 기도와 회개의 눈물로 일생을 보내는 수녀들이 그립기도 하여 들어가보고 싶었다. 예전 같으면 수녀원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 ‘피이’ 하고 비웃던 것, 그런 것이 자기의 흥미를 끌고 관심을 끄는 데에 정선은 스스로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죄인에게 종교.”

라는 어디서 들은 구절이 가슴을 찌른다.

“아이, 정선이로구나.”

하고 힘없이 걸어가는 정선의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응”

하고 정선은 돌아섰다. 그들은 자기와 동창인 석 ○○, 여 ○○ 두 여자였다.

“아이구머니나.”

하고 석이 정선의 차림을 보고 놀라는 듯,
“너 이 꼴을 하고 어딜 가니? 꼭 자다가 쫓겨난 며느리 같구나. 어디 남의 집 살러 가는 침모도 같고. 글쎄, 부잣댁 마님이 이게 웬일이냐?”

하고 혼자 웃어댔다.

정선도 부득이하여 빙그레 웃기는 하면서도, 석의 농담의 말이 모두 마음에 찔렸다.

“어딜 가우?”

하고 여도 반가운 듯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는 방글방글 웃는, 수줍어하는 여자다.

정선은 힘없이,

“나, 저, 다방골.”

하고 아무리 불편한 빛을 안 보이려 하여도 정선이 땅 밑으로만 가라앉았다.

“너 어디 아프냐?”

하고 석이 정선을 껴안으면서 걱정스럽게 묻는다.

“아니.”

하고 싱긋 웃었다.

“허 선생은 언제나 오시오?”

하고 여가 묻는다. 여와 석은, 바로 전에 정선의 이야기를 하던 끝이었다. 정선이가 허숭과 이혼을 한다는 둥, 하였다는 둥, 갑진이와 관계가 있다는 둥, 같이 산다는 둥, 동무들간에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던 끝에 정선의 모양이 수상한 것을 보니 두 동무는 의심과 호기심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정선은 여의 묻는 말에,

“모르지요.”

하고 웃음 섞여 대답할 뿐이었다.

“얘, 저어.”

하고 석은 농담도 다 제쳐놓으면서 말을 내기가 어려운 듯이,

“저어, 세상에는 이야기가 많더라. 네가 이혼을 한다느니, 또 머 별말 다 많지. 우리야 그런 소리를 다 믿겠니마는, 그야 안 믿지, 안 믿기는 하지만두, 저어, 그이 말이다, 그 저 김갑진인가 한 이하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라. 말없는 것만은 못하거든, 그 말이 허 선생 귀에라도 들어가면 안됐지.”

하고 정선의 눈치를 보았다.





정선은 석, 여 두 동무가 자기의 비밀을 죄다 알고 못 견디게 구는 것만 같았다. 그 둘의 눈이 무섭고 입이 무서웠다. 정선이 두 동무의,

“우리 저녁에 가마.”

하는 작별의 말을 듣고 부청 앞을 향하고 걸어갈 때에는 그 두 동무가 뒤에서 자기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래 힐끔 뒤를 돌아볼 때에는 두 동무의 모양은 벌써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정선은 감시하는 눈을 벗어난 죄인 모양으로 걸음을 빨리 걸었다. 정선은 아직 혼인 아니한 두 처녀의 순결함,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자기는 거기 비기면 마치 때 묻은 옷, 부스럼 난 몸, 더러운 오라로 얽힌 꼴같이 생각켰다. 내가 세상에 제일 잘나고 제일 행복된 사람이라고 자긍하던 것이 어제 같건마는.

다방골 천변으로 들어서서 소광교를 향하고 천변을 내려가느라면 조선집을 반 양제로 꾸민 집이 있고, 거기는 '婦人科, 小兒科’를 두 줄로 갈라 쓰고, 그 밑에 큰 글자로 '○○醫院’이라고 쓰고, 또 곁에는 '院長 ○○醫學士 玄○○’라고 좀 작은 글자로 쓴 현판이 걸렸다. 그 현판의 중간 이하에 물이 난 것이 이 병원이 선 지 여러 해 된 것을 보였다.

대문 안에는 인력거 하나가 서 있었다.

정선은 사랑채인 병원으로 아니 들어가고 안대문으로, 따라오는 사람이나 피하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언니!”

하고 정선은 안마루 유리 분합 앞에서 불렀다.

마당도 넓고 깨끗도 하고 꽤 큰 집이언마는 식구가 없어서 조용하였다.

정선의 소리에 건넌방 문이 열리며 열 댓 살 된 계집애가 내다보고,

“아이 오셔겝쇼? 선생님 지금 병자 보십니다.”

하고 분합을 열고 맞아준다. 여의 현 ○○는 하인들로 하여금 아씨니 마님이니 하는 말을 못 쓰게 한다. 그러므로 하인들은 현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정선이 구두를 끄르고 올라오는 동안에, 계집애는 사랑으로 통하는 일각문으로 댕기꼬리를 나풀거리며 쪼르르 뛰어나간다.

정선은 마루에 놓인 등교의에 몸을 던졌다.

'아이, 그 말을 어떻게 묻나?’

하고 집에서 몇시간이나 두고 하였던 생각을 또 되풀이한다.

정선이가 현 의사에게 물으려는 것이 무엇인가.

계집애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현이 들어온다.

현은 머리를 물결이 지게 지지고 자주빛 좀 짙은 듯한 양복을 입었다. 얼른 보기에는 이십이 될락말락한 처녀 같지마는 가까이 보면 얼굴에 삼십 넘은 빛이 보였다.

현은,

“어 정선군 왔나?”

하고 사내가 사내에게 대해 하는 어조를 흉내낸다. 현에게는 이런 버릇이 있었다.

“하우 두 유 두?”

하고 현은 역시 사내 모양으로 정선의 손을 잡아 흔들고, 그리고는 남자가 제 애인에게나 하는 모양으로 정선을 한번 껴안고, 그 이마에 키스를 하고, 그리고는 담요를 덮어놓고 눕는 교의에 턱 드러누워,

“복아, 담배 가져온!”

하고 명령한다. 그 어조는 여자다.





“그래.”

하고 현은 청지연 한 개를 피워 맛나는 듯이 연기를 내어뿜으며,

“에니 뉴스(무슨 새 소식 있나)? 그 어른 아직 안 올라오셨나. 대관절 우리 정선이같이 꽃같은 마누라를 두시고 무얼 하고 안 올까. 나 같으면 산보를 나가도 꼭 데리고 다니겠네.”

하고 뚫어지게, 귀여운 듯이 정선을 바라보며, 스며드는 연기를 피하느라고 눈을 한쪽씩 감았다 떴다 하며,

“참, 내 동생이 예뻐. 언제 보아도 예쁘지마는 오늘은 특별히 더 예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봐. 네 남편 올라오셨구나, 그렇지?”

하고 담배 연기를 일부러 정선에게로 불어 보낸다. 정선의 코에 그 부드러운 향기가 들어오는 것이 싫지 아니하였다.

“나도 담배나 한 대 먹을까?”

하고 정선은 파란 레텔로 싼 동그란 드리캐슬(청지연) 통을 물끄러미 보고 앉았다. ‘좋은 일이 있었느냐, 남편이 왔느냐’ 하는 현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현도 내 속의 비밀을 들여다보는가 하여 무서웠다.

그러나 정선은 얼른 대답하였다.

“응, 그이가 왔다 갔어.”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수 났다 하는 생각과, 아아 거짓말장이 하는 생각이 풀숲에서 나오는 양두사 모양으로 일시에 고개를 들었다.

“왔다 가셨어?”

하고 현은 놀라는 표정을 하며,

“아 그래, 나도 한번 안 보고 갔어? 오, 나한테 네 남편 뺏길까봐서 네가 나를 따돌리는구나.”

하고 깔깔 웃더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네 남편한테 물어볼 말이 있었는데. 다른 변호사한테는 가기 싫고.”

하고 유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또 온대.”

하고 정선은,

“고등법원에 무슨 소송사건이 있다나, 해서 또 수이 온답데다. 그때도 늦지 않거든, 그때에 물어보시구려.”

하고 아침에 받은 남편의 편지, 그것을 읽을 때의 광경 등등을 생각하고 휘유 한숨을 쉬었다.

현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정선의 한숨 소리에 눈을 번쩍 떠서 그 맑은 눈으로 정선의 고부슴히 숙인 낯을 흘끗 본다. 그리고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한다. 정선의 한숨과, 낯빛과, 자세와, 이 모든 낱낱의 재료에서 무엇을 귀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혼자 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이고 식지 끝을 들어서 궐련에 생긴 재를 톡톡 떨어버린다. 하얀 에나멜 재떨이에 재가 떨어져 흩어진다. 현은 마치 여름 하늘이 금시에 소낙비 구름에 흐리는 듯이 멜랑콜릭하게 변한다.

두 사람 새에는 말이 없고 현이 빨기를 잊어버린 궐련 연기만이 여러 가지 파란 모형을 그리면서 올라서 스러진다.

복이가 쟁반에 김나는 차 두 잔을 들고 들어온다. 불그레한 홍차다. 쟁반 위에는 모사탕 그릇과 크림 그릇과 은 찻숟가락이 놓였다. 순 서양식 차제구다.

현은 벌떡 일어나면서 삼분지 일이나 남은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서 꺼버리고,

“정선이, 자, 차나 먹어.”

하고 자기가 먼저 자기 잔에 사탕과 크림을 타서 저어서 한 입을 마신다.





“정선이 무슨 걱정이 생겼어?”

하고 현은 한 팔을 테이블 위에 세워서 턱을 괴고 물끄러미 정선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 눈은 아까 보던 맑은 눈이 아니라 슬픔에 찬, 젖은 듯한 눈이었다.

“아니.”

하고 정선은 분명히 부인하고 그 부인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상긋 웃었다. 현은 정선의 부정을 믿지는 아니하면서도, 남의 속을 억지로 알아내려고는 아니하였다. 다만 정선의 가슴에 근심과 슬픔의 새로운 그림자가 있는 것만은 아니 볼 수 없었다.

“언니.”

하고 정선은 교의를 현의 옆으로 바짝 잡아당기고,

“언니, 내가 애를 낳기가 싫은데, 어저께 남편이 다녀갔으니 어떡하면 애를 안 배게 할 수가 있을까.”

하고 주홍빛이 되도록 낯을 붉혔다.

“아, 하하하.”

하고 현은 사내 너털웃음을 웃었다.

정선은 더욱 부끄러워서 현의 다리를 꼬집으며,

“응, 왜 웃어.”

하고 항의하는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정선의 맘을 폭폭 찌르는 듯하였다.

“아야, 아야.”

하고 현은 여전히 웃으며,

“네 말에 웃는 것이 아니라, 오늘 왔던 환자 생각이 나서 웃는 거야. 네 말을 들으니까 꼭 그 사람 생각이 나는구나, 아하하 허허.”

하고 유쾌하게 웃는다. 현에게서는 멜랑콜리의 구름이 걷혀버렸다.

“무슨 환자야? 응, 어떤 환잔데 그렇게 웃으시우?”

하고 정선이 역시 멋없이 따라 웃는다.

“내 말 들어봐라.”

하고 현이,

“바루 아까 어떤 젊은 병자 하나가 왔단 말이다.”

“나 올 그때에?”

“응, 그게 그 사람인데. 인물도 잘 생겼어요. 살결이 희고 몸이 좀 육감적이지마는, 허기야 사내들의 맘에 들게 생겼길래 문제가 일어날 것이지마는. 그래 무슨 병이요 하니까, 꼭 네 병과 같은 병이어든. 글쎄, 그렇게 신통방통한 일이 어디 있니? 내 우스워.”

정선은 외면한다.

“아, 그래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지.”

하고 현은 말을 잇는다.

“처음에는 무에라고 부득 요령한 소리를 주워댄단 말야. 시도로모도로(일본말로 어름어름이라는 뜻)지. 그렇지만 내게 걸려서야 제가 배기나. 그만 울고 실토를 해버린단 말이다.”

하고 침을 한번 삼키고,

“어떤 교사의 아낸대, 남편이 한 달 전에 어느 시골을 갔대. 그런데 어떤 남자의 유혹으로 - 저는 강제라더라마는 무에 그럴라구 - 어쨌든 어젯밤에 훼절을 했다거든. 그러니 애기가 들었으면 어쩌느냐 말야, 제발 날더러 애기가 아니 배게 해달라는구먼. 그래 밉살스런 양해서는 ‘여보, 남편 있는 이가 한 달 동안을 못 참아서 남의 사내하고 애밸 짓을 해놓고는 누구더러 애기를 아니 배게 해달라오’ 하고 싶었지마는, 거기는 또 의사의 도덕이 있단 말이다. 도적놈이거나 서방질한 년이거나 그것은 물을 것이 없단 말야. 내 원.”

하고 현은 남은 차를 마신다.

“그래서? 언니는 무에라고 했소?”

하고 정선은 중요한 점을 아니 놓치려고 물었다.

“그래서,”

하고 현은 담배를 새로 붙이며,

“‘그거 아니 배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해놓고는 하도 가엾길래, ‘오늘로 남편한테로 가시구려.’ 했지. 하하하하. 내가 죄지, 잘못했지?”

하고 또 웃는다.





“그래 어떡하셨소?”

하고 정선은 그 여자가 어떠한 치료를 받았는가가 알고 싶었다.

“그랬더니 말야.”

하고 현 의사는,

“글쎄, 그 남편이 폐병으로 어느 요양원에를 가 있다는구나. 폐병으로 요양원 가 있는 남편을 따라가기로니 같이 잘 수가 있느냐 말이지. 글쎄, 정선아, 이런 딱한 일이 어디 있니? 어떻게 우스운지, 그러니까 그도 못한단 말이지. 그러면 어쩌면 좋으냐고 그러길래 글쎄, 제일 확실하려면 자궁을 긁어내거나 떼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그랬지.

벌써 이십 시간이나 지났으니 이제는 벌써 정충이 자궁벽에다가 뿌리를 박고 어머니 피를 빨아먹으면서 분열하기를 시작했으리라 하고, 벌써 그 정충은 남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나 딸로 인연이 맺혔다고, 이제 그것을 떼어버리는 것은 자식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의사법에도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한 때에만 한하여서 의사가 유산 수술을 하는 것을 허한다고, 그런데 당신은 건강한 사람이니까 유산 수술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그러니깐 이러겠지,

그렇지만 만일 아기가 나온다 하면 남편의 꼴은 무엇이 되고 자기 꼴은 무엇이 되느냐고, 그리고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를 떼어달라고 운단 말야, 눈물을 흘리고. 글쎄, 정선아, 나도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리 될는지 모르지마는 어떻게 제 몸에 붙은 생명을 뗄 생각이 나니?

그렇거든 서방질을 말 게지. 그렇게도 서방이 없으면 못 사니? 난 그까진 사내 생각 안 나더구나. 또 서방질을 하면 책임질 생각을 하고 하든지. 그게 무에야, 해놓고는 애꿎은 어린애만 떼러 들어. 망할 년들 같으니. 안 그러냐 정선아.”

하고 현 의사는 혼자 좋아한다.

정선은 현의 말을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말 마디마디가 모두 자기를 두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곧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지마는 그러기도 안되었고, 화제를 돌리려 하여,

“언니는 그래, 남자란 영 싫소?”

하고 웃었다.

“그럼, 싫지 않어?”

하고 현은 반 농담으로,

“이렇게 나처럼 혼자 살면 참 자유롭다. 난 그 시집간 동무들 하나도 행복하다는 사람은 없더라. 정선이 너는 안 그러냐. 그까짓 사내들 냄새만 피우고….”

하고 당장 불쾌한 냄새나 나는 듯이 낯을 찡긴다. 찡길 때에 현의 태도는 더 어여뻤다.

“냄새? 무슨 냄새?”

하고 정선은 웃었다.

“입구린내, 발 고린내, 머리 때 내, 맨 냄새지. 그리고 되지 못하게 아니꼬운 내, 왜 넌 사내 냄새 없든?”

하고 현도 웃는다.

정선은 갑진의 겨드랑 냄새를 연상하였다. 그러나 정선의 기억에 그 냄새는 도리어 흥분을 시키는 듯한 쾌미가 있었다. 허숭도 생각하였다. 허숭은 파, 마늘을 절대로 아니 먹어서 그런지, 입에서도 몸에서도 냄새가 나지 아니하였다.

“언니두. 언니는 아마 사내 싫어하는 병이 있나 보구려. 어쩌면 언니는 도무지 혼인할 생각을 아니하시우? 도무지 남자 교제를 한단 말조차 없으니. 그리고 적막하지 않우?”

하고 정선은 동정하는 듯이 물었다. 정선은 현의 과거를 생각한 것이었다. 현은 그렇게 얌전하게 생기고, 또 모양을 내기로 유명하고 또 재산 있는 처녀로 유명하면서도 남녀 문제에 관하여 한번도 남의 입에 오른 일이 없는 것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야 적막한 때도 있지. 나도 여자 아니냐. 허지만 쓸데없이 이 사내 저 사내 교제나 하면 남의 이야깃거리가 되지 무엇하니. 또 혼인하자니 맘에 맞는 남편도 없고. 글쎄 있다면 한 사람쯤 있을까.”

하고 의미 있게 웃는다.





“그게 누구요? 언니, 그게 누구요?”

하고 정선은 현에게 졸랐다.

“그게?”

하고 현은 장히 말하기 어려운 듯이 한참이나 정선의 애를 먹이다가,

“정말 일러주랴.”

하고 현은 한 손으로 테이블 전을 탁탁 치면서,

“그래도 놀라선 안돼, 성내선 더구나 안되고….”

“그래. 아이, 그만 애 먹이고.”

하고 정선은 지금까지의 불쾌한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듯한 가벼움을 느끼면서 짜증내는 양을 보였다.

“가만 있어. 그렇게 쉽사리 비밀을 알으켜줄 줄 알구? 안되지, 흥.”

하고 현은 벌떡 일어나서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함 하나를 들고 나온다. 그 함을 정선의 앞에 놓으며,

“자, 이걸 좀 보아. 그리구 그중에서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가, 또 누가 제일 맘에 드는가, 알으켜내어.”

하고 뚜껑을 열어젖힌다.

정선은 호기심 있는 눈으로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는 수 없어 보이는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양 봉투, 조선 봉투, 철필로 쓴 것, 먹으로 쓴 것, 잘 쓴 것, 못 쓴 것, 흘려 쓴 것, 해자로 쓴 것 등 가지각색이었다.

그 글씨가 가지각색으로 다른 것으로 보아, 이것들이 다 여러 사람에게서 온 것을 알 것이다.

“어머니나!”

하고 정선은 무서운 것이나 보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다 웬 편지요? 다 언니한테 온 러브 레타요?”

“그렇다네. 그것만 흥, 같은 사람한테서 온 여러 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만 하나씩 골라서 표본으로 모아둔 것이란 말야. 처음에는 오는 대로 뒤지도 하고 불쏘시개도 했지마는, 차차 생각해보니깐 표본만은 모아두는 것이 후일에 참고될 것도 있을 듯하단 말이지. 또 재미도 있고. 그래서 작년부터 이렇게 모으기를 시작한 것이란 말야. 내가 이렇게 받았으니깐 정선이도 퍽 많이 받았을 테지. 나보다 어여쁘고, 젊고, 부자요, 귀한 집 따님이니깐 오죽하랴고.”

“아니야, 언니. 나도 더러 받기는 했지마는 모두 합해야 스무 남은 장 될까. 난 그리 많지 않아요. 언니, 언니가 미인이지 내가 뭐 미인이요?”

“암 그렇지. 정선이야 미인인가… 그런데 정선아, 너 교제 좀 삼가라. 이 박사랑, 김 남작의 아들이랑 너무 자주 너의 집에 다닌다고 말들 하더라. 무슨 일이 있을 리야 없겠지마는 그래도 네 남편한테 그런 말이 굴러들어가면 재미가 없거든. 또 젊은 여자가, 그도 처녀도 아니요, 남의 아내가, 왜 남의 시비 들을 남자 교제를 하느냐 말이다.

남자들이 너를 따라올 때에야 네 지식을 따라오겠니? 인격을 따라오겠니? 세력을 따라오겠니? 입으로는 무슨 꿀 바른 소리를 할는지 모르지마는, 결국은 네 자색을 따라오는 것이어든. 나도 그렇지, 이 작자들이 내게 반해서 이런 편지를 하고, 선물을 하고, 별 짓을 다 하지마는 그 속은 내 몸을 한번 가지고 놀아보자는 것이지. 그 중에는 내가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홀몸이니깐 이 집간이나 있는 것을 탐내는 놈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몰라, 빤히 다 알고 있지. 그리고 속아? 미쳤나 왜.”

하고 픽 비웃는다.





“그럼.”

하고 정선은 현의 말에 부득이한 찬성의 뜻을 아니 표할 수 없다.

“요새 조선 사내들은 모두 계집 후릴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은 없나 보더라. 그것이 요샛말로 모던인지도 모르지. 자 이것 보아요.”

하고 현은 편지들을 테이블 위에 쏟아놓고 찾아내기 쉽도록 골패 젓듯 뒤저어서 테이블의 면적이 허하는 한에서 널따랗게 벌여놓고, 그 중에서 옥색 양 봉투에 영문으로 겉봉을 쓴 편지 하나를 골라서,

“자, 이거 뉘 글씬지 알어?”

하고 정선의 눈앞에 든다.

“응, 그거 이 박사 글씨 같구려.”

하고 정선도 놀란다. 정선도 꼭 이런 글씨의 편지를 가끔 받는 까닭이다.

“올라잇.”

하고 현은 봉투 속에 있는 편지를 꺼내어서 읽는다.

‘오 나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닥터 미스 현이시여!

전에 드린 수차 편지에 한번도 답장을 받지 못한 것을 조금도 원망치 아니하옵니다. 그것은 이유가 없지 아니하오니, 대개 첫째는 소생의 전 심령을 다 바치는 지극한 사랑은 미스 현에게 향하여 사랑 이외의 아무러한 감정도 일어나지 못하게 함이옵고, 둘째는 미스 현께서 아직 소생의 인격과 성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심입니다.

세상에는 소생에 관하여 여러 가지 풍설이 있사오나 그것은 전연 무근지설이오며, 소생의 명예를 해하려고 시기하는 자들이 조작한 것입니다. 소생은 지금까지에 여성 친구를 여러 사람 가진 일은 있사오나 어떤 여성에게 대하여 사랑을 바친 것은, 오, 하느님이시어, 오직 미스 현 한 분뿐이오며, 과거와 현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미래와 영원에도….’

여기까지 읽다가 현은,

“자, 이 작자 하는 소리 보아요. 다른 여자는 다 친구요, 애인은 나 하나뿐이라나. 허허. 아마 이런 소리는 누구에게나 했을 소린 줄을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순례, 서분이한테도 이 소리는 했을 게다. 네게는 안했든? 허기는 이 작자만은 아니야. 여기 있는 편지들을 보면 대개는 내게 대한 것이 첫사랑이라지. 사랑에 거짓말을 하는 놈들이니 다른 일에야 더 말할 것 있나.

그러니깐 나는 이 작자들을 안 믿는단 말야. 누구누구 하는 놈들이 다 거짓에 껍데기 씌운 놈들이어든, 셀피슈하고. 대체 별소리가 다 많아요. 저는 아직 정남이라는 둥, 상처를 했다는 둥, 가문이 양반이라는 둥, 귀여운 소리를 하는 애숭이도 있고, 어떤 것은 사뭇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작자도 있고, 또 어떤 작자는 내가 혼자 사는 것이 가엾으니 자기가 나를 보호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마 하는 자선가도 있고… 대체 없는 소리가 없지. 또 이거 하나 보련?”

하고 현은 기름한 흰 봉투에 먹으로 썩 잘 쓴 편지 한 장을 골라 들고,

“이것 보아요? 이게 누군데?”

하고 편지 끝에 있는 서명을 보인다. 그것은 모 교육자요, 종교가다.

“이 어른도 그런 편지요?”

하고 정선은 더 크게 놀랐다.

“자, 이거 또 하나 보아. 이건 누군데?”

하고 또 한 편지를 보인다.

그것을 본 정선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것은 어떤 이름난 교육자였다.

“또, 이건.”

하고 굉장히 큰 봉투 하나를 집어든다. 정선은 웃지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나 많은 어떤 재산가였다. 현도 깔깔 웃었다.





현은 특색 있는 여러 편지를 정선에게 보인 뒤에,

“얘, 복아, 난로 좀 피워라.”

하여 전기 난로에 불을 피게 하고,

“정선아, 너 썩 재미있는 편지 하나 보련?”

하고 두 손가락을 빳빳하게 뻗쳐 가지고 편지를 위로 몇 번 들다가, 그 중에서 황지 봉투에 철필로 되는 대로 갈긴 편지를 다른 커다란 편지 밑에서 찾아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상등 편지지에 극히 정성스러운 필적으로 썼건마는, 황지 외겹 봉투에다가 철필로 막 내갈긴 것이 눈에 뜨인다. 그 글씨조차도 아주 유치하였다.

“너, 이 글씨 아니? 잘 알겠구나.”

하고 현은 정선을 놀려먹는 듯이 눈을 끔쩍하였다.

정선은 그 글씨는 본 적이 없었으나, 현의 말 눈치로 그것이 갑진인 것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정선은 맘에도 없이,

“잘 모르겠는데.”

하였다.

“좀 보아요. 네 애인이 내게 보낸 연애편지니 좀 보아요. 나는 지금까지 본 편지 중에 이 사람 편지가 제일 스끼(일본말로 좋아한다는 뜻)야. 다른 사람들은 무에라고 짓고 꾸미지. 그렇지만 이 작자는 그것은 없거든. 자 보아요, 내 읽으께.”

하고 현은 웃음 절반으로 갑진의 편지를 들고 읽는다.

‘현 의사, 나 당신 속 모르겠소. 당신같이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 왜 남자를 모르시오. 인생의 낙 가운데 남녀의 낙같이 좋은 것이 또 있소? 나하고 사랑합시다. 내 인생의 새로운 방면을 가르쳐주리다.’

까지 읽고 현은,

“어때, 이 작자의 수작이?”

하고 읽기를 계속하여,

‘나는 지금 조선에서는 제일 잘난 사내요, 젖비린내 나고 문화 정도가 낮은 조선 계집애는 도무지 아이데(일본말로 짝)가 아니 되오. 오직 현 의사만이 내 짝이 될 것 같소’

하고 현은 또,

“자, 이 작자 하는 소리 보아요.”

하고 깔깔 웃는다.

그러나 정선은 웃을지, 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만 잇새만 빨았다.

“또 봐요. 끝이 더 장관이니.”

하고 현은 또 읽는다.

‘나는 여태껏 어떤 여자든지 맘에 두고는 내 것을 못 만들어본 일이 없소. 오직 세 사람이 있을 뿐이오. 그것은 현 의사와, 현 의사가 사랑하신다는 윤정선과, 또 하나, 이것은 이름을 말하더라도 현 의사는 모르시리다. 맘에 두고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이 세 사람뿐이오. 그런데 윤정선은 내 친구의 아내요.

그렇지마는 이애는 아직 시집가기 전부터 내가 눈독을 들였는데, 고만 허숭이놈한테 빼앗겨버리고 말았소. 그러나 사내가 한번 맘을 먹었다가 흐지부지하고 어떻게 산단 말요. 내 일주일 안에 그 계집애를 내 손에 넣기로 작정을 하였으니, 그 일이 끝나면, 또 한 계집애에게 분풀이를 하고 나서 그 뒤에는 과거의 복잡한 생활을 청산하고, 당신을 참으로 사랑해볼까 하오’

여기까지 읽고 현은,

“이제는 날더러 당신이라고.”

하고 또 읽는다.
'내 들으니, 당신은 도무지 사내를 접촉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후려도 넘어가지 아니한다 하니, 조선에도 이런 여자가 있는가 탄복함을 마지아니합니다'

여기 와서 현은,

“후후, 이제는 탄복하오가 아니라 합니다래.”

하고 자못 만족한 모양이었다.





현은 또 갑진의 편지를 읽는다.

‘내가 건드려서 휘지 아니하는 여자가 있다 하면 나는 그 여자를 숭배하거나 죽이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하려 하오. 그러나 불행히 나는 아직 그러한 여자를 만나지 못하였소. 원컨대 현 의사여! 당신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숭배케 하거나 죽이게 하소서’

현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자, 어떠냐?”

하고 편지를 봉투에 넣어 테이블 위에 내어던지며,

“아마 이런 연애편지는 세계에 드물 것이다. 굉장하지?”

하고 혼자 좋아한다.

그러나 정선은 이 편지를 듣는 동안 분함, 부끄러움, 울렁거림이 모두 뒤섞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언니는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우?”

하는 것이 가까스로 정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좋은 사람, 그야 김갑진이가 좋은 사람은 아니겠지. 색마겠지. 그렇지마는 같은 색마라고 하더라도 이건영이보다는 여러 등 높단 말이다. 첫째는 힘이 있거든, 여자에게 애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한단 말이다. 도무지 젊은 여자 앞에 오면 발바닥이라도 핥을 듯이 귀축축한 남자와는 다르단 말이다.

또 하나는 이 작자의 정직한 것이 좋단 말이다. 얼마나 프랭크하냐 말야. 속에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입으로 저것을 말하는 작자들보다는 통쾌하거든. 얘, 난 참 조선 남자들한테는 낙망하였다. 어디 사내답게 씩씩하고 정직한 사내가 있더냐. 모두 돈에 세력에 계집에 코를 줄줄 끌고 다니는 꼴을 보니 기가 막히단 말이다.

이 갑진이란 작자는, 젊은 녀석이 대학까지 마친 녀석이, 좋은 일 하나 할 생각 아니하고 밤낮 여자들만 따라다니니 죽일 놈인 것이야 말할 것 없지마는, 저 지사의 탈을 쓰고, 도덕가, 예수교인의 탈을 쓰고 그 짓을 하는 작자들보다는 되려 통쾌하고 가와이이(귀엽다) 하단 말이다. 또 김갑진의 말도 옳지 아니하냐. 계집애들이 싯까리(단단)하기만 하면야 사내들이 어떻게 덤비나? 못하지.

요새 계집애들이 헤프니깐 사내들이 넘보고 그러는 게다. 어디 정선이 네나 순례 같은 애야 무슨 말 들었니? 순례는 건영이 때문에 그렇게 되었지마는, 그야 순례 잘못이냐. 또 정선이 너도 김갑진이와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지마는, 그야 남들이 정선이를 몰라서 하는 소리지. 아무러기로 우리 정선이가 김갑진한테 넘어가겠니?

그러니까 걱정이란 말이다. 숭배를 하거나 죽인다고 했으니, 네나 내나 숭배를 받거나 죽을 판이로구나. 또 한 계집애란 누구야. 거 원, 순례나 아닌가. 이 김갑진인가 한 작자가 헤픈 계집애들은 다 주워 먹고 인제는 좀 단단한 축을 노리는가 봐. 하하하하. 또 한 여자라는 게 순례만 같으면야 어림이나 있니? 그러해서 조선 여자란 어떤 것인가를 따끔하게 그런 녀석에게는 알려주어야 한다. 하하하하.”

하고 현 의사는 유쾌하게 웃는다. 정선도 어찌할 수 없이 따라 웃었다. 그러나 등골에서는 찬 땀이 흘렀다.

“언니, 난 가우.”

하고 정선은 일어났다.

“왜, 저녁 먹고 놀다 가.”

하고 현은 정선을 붙든다.

“가보아야지.”

하고 정선은 옷의 구김살을 편다.

“애기 뗄 생각은 말어.”

하고 현은 훈계하는 듯이,

“그런 비겁하고 무책임한 짓이 어디 있니? 또 남편에 대한 정보다 자식에 대한 정이 더 깊다더라. 어서 낳아 길러. 아버지 어머니가 착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니 애긴들 오죽하랴고. 내 아주머니 노릇 잘 해주께.”

하고 정선의 등을 두드렸다.





정선은 현 의사한테로부터 집에 돌아오는 길로 짐을 싸가지고 오후 일곱 시 특급을 타고 남편 허숭이 있는 살여울을 향하였다. 정선은 현이 어떤 여자더러, ‘남편한테로 가구려’하던 말대로 실행하려 한 것이었다.

정선은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살여울 가는 정거장에서 하나 더 가서 읍내 정거장에서 내렸다. 아직 캄캄하였다. 특급차는 작은 정거장엔 정거를 아니하는 까닭이었다. 정선은 아직도 자고 있는 자동차부를 깨워 일으켜서 아니 간다는 것을 제발 빌어서 이십 리 남짓한 살여울을 십원이라는 엄청난 값으로 자동차를 세내어 타고 살여울로 향하였다.

살여울을 다 가도 아직 해가 뜨지 아니하였다. 칠백 리나 서북으로 온 이 지방은 서울보다 대단히 추웠다. 정선은 슈트케이스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들어가면서 촌락 가운데 길을 피하여 달내강가로 더듬어 바로 남편의 집 허숭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귀밝은 동네 개들은 정선의 구둣자국 소리를 알아듣고 한두 마디 짖었다.

정선은 남편과 작별하기 전에 가끔 나와 앉았던 강 언덕에 짐을 놓고 좌우 가에 반이나 살얼음이 지핀 강을 들여다보면서 그때 일을 회상하였다.

남편의 집은 새벽빛에 싸여 남빛에 가까운 자줏빛으로 보였다. 정선은 죄짓고 쫓겨났다가 빌러 들어오는 며느리 모양으로 짐을 들고 언덕길을 추어올랐다. 새로 판 우물가에는 오지 자배기에 두부와 고비가 맑은 물에 담기어 놓인 것이 보였다. 정선에겐 그런 것이 다 다른 세계 것같이 보였다. 정선은 무심코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컴컴한 우물 속에는 손바닥만한 빛 받은 물이 수은빛으로 흔들렸다. 마치 정선의 입김에 물결이 지는 것 같았다. 정선은 그것이 형언할 수 없이 신비한 것 같고 무서운 것 같았다. 서울 생장인 정선은 우물을 들여다본 일이 없었거니와, 우물이 정선에게 주는 비상한 감동은 오직 이 '처음 봄’만은 아니었다. 마치 예수교의 세례에 사람의 머리에 떨구는 물 몇 방울이 그 사람에게 큰 정신적 감동을 주는 것과 같은, 지금 당장은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정선은 차마 여기서 더 갈 용기는 없었다.

‘내가 아무 일 없이 남편을 찾아왔다 하면, 얼마나 호기스럽고 자랑스러울까.’

이렇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다.

‘내가 무엇 하러 여기 왔나? 내 죄를 숨기려고, 남편과 세상을 속이려고 온 것이 아니냐.’

하면 땅에 쓰러질 것 같았다. 정선은 우물 기둥을 붙들고 몸을 지탱하였다.

불끈 솟는 해 - 먼지와 연기 없는 깨끗한 대기 중에 해는 잠 깬 혈색 좋은 어린애가 고개를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누런, 신선한 햇빛이 우물 기둥에 기대어 괴로와하는 정선의 몸을 비추었다. 그것은 한 폭 그림이었다.

우물에서도 수십 척이나 되는 언덕을 올라가야 남편의 집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남편의 집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정선은 또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하던 흰 점은 커져서 환하게 열린 수면이 정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정선은 제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듯이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딸그락딸그락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선은 물동이를 들고 내려오는 순이를 보았다.

“아이그머니!”

하고 유순은 화석과 같이 우뚝 섰다. 그는 하도 놀라서 그 이상 더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정선도 숨만 씨근거릴 뿐이요,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억압인가. 질투인가.

정선에게나 유순에게나 이 자리는 유쾌한 신(장면)은 아니었다. 미움, 분함에 가까운 감정이 거진 같은 날카로움으로 마주선 두 여자의 가슴을 폭폭 찔렀다. 겨울 아침다운 싸늘한 광경이었다.





“아이그, 너 얼마나 애를 썼니?”

먼저 이 괴로운 적막을 깨뜨릴 소임은 정선이가 할 수밖에 없었다. 정선은 어른, 주인아씨, 교육과 지위 높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억지로 회복해서 입을 연 것이다.

“그 동안 아무 일 없었니?”

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 오셨어요?”

시골 계집애인 유순의 입에서는 이 이상의 예절다운 말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물동이를 발 앞에 내려놓았다.

“선생님 안녕하시냐. 아직 주무시니?”

하고 물을 때에 자기가 남편을 찾은 목적이 얄미운 짐승 모양으로 자기와 유순의 앞으로 날름거렸다.

“에그, 못 만나셨네.”

하고 유순은 다시 놀라는 표정을 하였다.

“응?”

하는 정선의 가슴은 쌍방망이질하는 듯하였다.

“그저께 아침 차로 서울로 올라가셨는데.”

하고 유순은 가엾어하는 듯이 정선을 보았다.

“무어? 그저께 아침 차?”

“네. 그저께 아침 차요.”

“어제 아침 차 아니구?”

“아냐요. 그저께가 장날인데 아침 차로 떠나셨는데.”

하고 순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는 눈을 짓는다.

정선은 그만 슈트케이스 위에 쓰러져 울었다. 몸부림이라도 칠 듯이 울었다.

“무얼요, 선생님 내려오신 줄 아시면, 곧 돌아서서 오실 걸요.”

하고 정선이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아니하는 남편을 찾아 허위단심으로 밤차를 타고 왔다가 남편을 못 만나서 우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유순은 눈물이 쏟아지도록 동정하는 맘이 생겼다. 지금까지 가슴에 있던 질투의 그림자조차 다 스러지고 말았다.

“들어가세요, 추운데.”

하고 유순은 가만히 정선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선은 반항하지 아니하고 유순에게 끌려 일어났다. 유순은 물동이를 우물가 물동이 자리에 놓고, 정선의 짐을 들고 앞을 서서 언덕길을 걸어올라갔다. 정선도 그 뒤를 따랐다. 장쾌한 아침 햇빛이 잎 떨린 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두 여자를 고동색 언덕빛과 조선에서만 보는 쪽빛 하늘 배경 앞에 그려내었다. 그러나 어두운 정선의 가슴에서 솟는 검은 눈물은 막을 수 없이 앞을 가리었다.

한갑 어머니가 부엌에서 새벽 동자를 하다가 반색을 하고 나와서 정선을 맞는다. 정선은 괴로움으로 찌그러지고, 눈물로 젖은 낯에 억지 웃음을 지어서 한갑 어머니의 인사에 대답하였다.

아아 남편의 방! 정선은 남편의 방에 들어간 아내다! 칠도 아니한 책상, 책장, 미투리 삼는 신틀, 벽에 걸린 옥수수, 조 이삭, 허울 좋은 수수이삭, 탐스러운 벼이삭, 입다가 둔 광목 옷들. 서울 집의 허숭 내외의 침실과는 이상한 대조다.

정선의 눈은 방안을 두루 돌다가 책상머리에 붙여놓은 사진을 보았다. 그것은 정선의 사진이었다. 자기가 남편을 잊고 있던 동안에 남편은 날마다 이 사진을 보고 자기를 생각하던 것을 생각하니 슬펐다.

정선은 책상 위에 놓인 공책을 열었다. 그것은 시골 보통학교 아이들이나 쓰는 연필 공책이었다.

‘시월 ○일. 오늘도 아내에게 편지가 안 온다.’

‘시월 ○일. 오늘은 동네 길 역사를 하였다. 다들 재미를 내고 열심하는 것이 기뻤다. 내일은 우물을 치고, 우물길을 수축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모양으로 살여울은 날로 새로와 가고, 힘 있어 가는 것이다. 살여울은 곧 조선이다.’

‘그런데 왜 우리 정선에게서 편지가 없을까?’

이러한 구절도 있었다.





정선은 남편의 일기책을 더 뒤져보았다.

‘십일월 ○일. 춥다. 쌀값이 오른다고 기뻐들 한다. 협동조합 저리자금이 있었기에망정, 그것이 아니더면 이 동네 사람들도 싼 시세에 다 팔아버렸을 뻔하였다. 이 동네 부자들도 조합에 들어 주기만 하였으면 좋으련마는, 자금 부족도 없으련마는, 그렇지마는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도무지 웬일인가. 정선이가 병이 났나. 퍽 그립다.’

또 얼마를 지나가서는,

‘그럴 리가 없다. 그의 말은 못 믿을 말이다. 남의 아내를 의심케 하려는 비루한 반간이다!’

라고 쓴 것이 있다. 글씨도 크게 함부로 갈기고 또 어느 날이라는 날짜도 아니 적혔다.

정선은 놀랐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의 말이라는 '그’란 누구요, '말’이란 무슨 말일가. 아내를 의심케 하는 말이라고 하니 또 그 말에 매우 흥분된 것을 보니 정선의 정조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면 자기와 갑진과의 관계에 대한 누구의 밀고인가. 그것이 대체 누구일까?

‘오, 이건영이!’

하고 정선은 혼자 대답하였다. 갑진에게 대한 질투로 이런 일을 하염직도 한 일이다 하였다.

‘그렇기만 하면야 변명할 길도 없지 않지 - 전혀 무근지설이라고 그러지.’

이렇게 속으로 작정하고, 정선의 혼은 둘로 갈려서 한 혼은 안심하고, 한 혼은 부끄러웠다.

‘인제야 속일 수밖에 있나.’

하고 정선은 남편을 대하게 될 때에 할 변명거리를 생각한다.

‘그럼 무어 속이는 건가. 말을 아니하는 게지. 그대로 실토를 했다가는 큰일 나게. 아이 부끄러워, 아이 부끄러워! 입 꼭 다물고 있으면 고만일걸, 왜 실토를 해? 시골 사람은 무섭다던데. 남편이 어찌할 줄 알고. 그 말을 왜 해? 가만 있지. 남편을 속이는 것이 미안이야 하지마는 누가 어땠나? 무어 단 한번, 그도 잠깐, 그것도 유혹을 받아서 그런 걸. 그래 말 안하기로 해!’

하고 정선은 마치 경매에 낙가하듯이 말 아니하기로 손바닥을 딱 쳤다.

‘실토만 말아. 그리고 후엘랑은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걸.’

그렇지마는 풀리지 아니하는 것은 뱃속에 들었는지 모를, 자꾸만 들어 있는 것만 같은 아이 문제다. ‘단 한번, 그도 잠깐’이라고 정선은 갑진이와 사이에 지어진 자기의 허물이 바늘끝으로 한번 찌른 자국에 지나지 않게 적게 보려고 하지마는, 그 단 한번이라는 것이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원히 소멸할 수 없는 자취를 남겼을 뿐더러, 만일 잉태한 것이 사실이라 하면 새로 생긴 생명을 통하여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하는 인륜 관계까지 발생하게 할 것이다.

‘자궁을 긁어내어 달랠걸’

하고 정선은 후회한다.

밤차로라도 곧 서울로 올라가려고도 했지마는, 그랬다가 또 차에서 길이 서로 어긋나도 안되겠고, 여기서 남편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자니 그랬다가 늦도록 아니 내려와도 걱정이었다. 문제는 하루라도 바삐 남편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보고 싶어서보다도 죄의 흔적을 소멸하기 위하여서 시각이 바쁘게 남편을 만나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다.

“상 드려요?”

하고 유순이 문을 방싯 열었다. 그 동안에 아침을 지은 것이다.

밥은 방아에 찧은 쌀, 방아에 찧은 쌀은 생명을 가진 쌀이다. 도회의 돌가루 섞은 배아와 단 껍질 다 벗겨진 쌀과는 다르다.

그리고 토장국, 무나물, 김치, 두부, 고기.





정선은 밥을 먹어가며 순이에게 이 말 저 말을 물었다. 무심코 묻는 듯하면서도 묻는 정선에게는 여자에게 특유한 은미한 계획이 있었다.

“내가 안 온다고 걱정하시든?”

하고 정선은 유순을 통하여 남편의 속을 떠보려고 하였다.

“그럼요.”

하고 대답은 해놓고는 유순은 어떤 대답을 해야 옳을까고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되, 정선의 눈치를 보아서 하려는 듯이 심히 날카로운 눈으로, 그러나 그 날카로움을 웃음으로 싸서 정선을 살펴보다가,

“날마다 기다리셨답니다. 차 시간만 되면 저 등성이에, 저기 저 등성이 말씀야요(하고 창을 열고 가리키며), 저 등성이에 올라가시어서 정거장 쪽을 바라보시고는 오늘도 안 오는군, 그러신답니다.”

“편지도 기다리든?”

하고 정선은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을 묻는다.

“그럼요. 우체 사령이 왔다가면 퍽으나 섭섭해하시는걸요.”

하고 유순은 허숭이가 길게 한숨을 내어쉬고 무슨 생각에 잠기던 것을 생각하고 그 모양을 정선에게 더 자세히 그리려 하였으나, 자기가 허숭에게 너무 깊이 관심하는 것을 정선이가 되려 이상히 알까 보아 그만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울 가시기 전에 무슨 말씀 없든?”

하고 정선은 무심코 돌아오는 듯이 목적한 정통에 맞는 살을 쏘았다.

유순은 이 말에 대답하기 전에, 그저께 식전 차를 타러 떠날 적에 가방을 들고 주재소 앞 큰길까지 나아간 자기를 숭이가 어깨를 껴서 정답게 한번 안아주며,

“내 갔다올께.”

하고 손을 꼭 쥐어주던 것이 생각나서 낯이 붉게 됨을 깨달았다.

이것은 처음 되는 일이었다. 그 아내 정선에게 충실하여 유순의 손길 하나 건드린 일이 없던 허숭이가 어찌하여 유순에게 이만한 친절을 보였을까? 그것은 다만 먼 길을 떠나는 작별일까. 또는 아내 되는 정선에게 대한 의심과 불만이 숭에게 남편으로서 받는 도덕적 제한을 늦추어준 것일까. 또는 진정으로, 다만 털끝만한 발표도 없이 숭에게 바치는 순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대답을 작별의 순간, 춥고 어둡고 감회 많은 순간에 잠깐 드러낸 것일까.

“별말씀 없으셨셔요. 어디 무슨 말씀 하시나요.”

하고 유순은 정선에게 속 뽑히지 아니할 차비를 한다.

“그 전날 무슨 편지 안 왔어?”

하고 정선은 숭늉에 밥을 만다.

“편지가 왔던가 보아요.”

하고 순은 대수롭지 아니한 것같이 대답한다.

“무슨 봉투? 서양 봉투, 일본 봉투?”

하고 정선은 중요한 단서나 잡은 듯이 밥술을 대접에 걸쳐놓고 묻는다.

“서양 봉툰가 보아요.”

“그래. 선생님이 그 편지를 보시고 무어라대?”

“전 자세히는 못 보았어요. 허지만 나중 보니깐 그 봉투가 온통 조각조각 찢어졌어요.”

“그래, 그 찢어진 것 어디 있니?”

“아궁이에 넣어서 태워버렸죠. 태워버리라고 하시는 걸요.”

“한 조각도 없어, 요만큼도? 글자 한 자라도 붙어 있으면 좋으니.”

하고 정선은 애가 탔다. 그것이 뉘 편지인가, 아무렇게 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없습니다. 다 태운걸요.”

하고 유순은 뚝 잡아뗐다.

“그래두우 나가 찾아보우, 혹시 한 조각 남았나, 어여.”

하고 정선은 정답게 유순을 졸랐다.





유순은 부엌에 나가서 종이조각을 찾아보았다. 있을 리가 있나? 하고 유순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없어요.”

하고 보고하였다.

“잘 찾아보아.”

하고 정선은 유순이가 마치 찾을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아니 찾기나 하는 듯이 좀 화를 내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남편의 집에 오는 즉시 웬 찢어진 종이조각을 찾느라고 안달하는 것이 어떻게 우스운 것인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유순은 정선의 행동이 좀 불쾌하였다. 우물가에서 쓰러져 울 때에 솟았던 동정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 우선 남편은 서울 간 지가 이틀이 넘도록 정신도 없이 있다가 터덜거리고 내려온 것이 싱겁게 보였다. 그런데 그 편지는 대관절 무슨 편지길래 그리 애걸을 하는가.

아마 정선이가 서울서 무슨 죄를 지었는데 그 편지는 그 죄를 허 선생에게 일러바치는 것인가. 허기는 그 편지를 받자마자 허숭이 그것을 박박 찢어버리는 양이 수상도 하였다 - 유순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편지 조각을 찾아내어서 정선에게 보이고 어떤 모양을 하는가 보고 싶었다.

유순은 다시 부엌으로 내려가서 나뭇단을 들어내고 부엌 구석을 뒤진다.

“넌 아까부터 무얼 그리 찾니?”

하고 아궁이 앞에서 감자를 깎던 한갑 어머니가 순을 돌아본다.

“편지 찢은 조각요.”

하고 순은,

“참 할머니, 편지 찢은 조각 못 보셨어요?”

하고 입에 손을 대고 웃는다.

“편지면 편지지. 편지 찢은 조각은 다 무엇이냐?”

하고 한갑 어머니는 호기심을 일으킨다.

“그런 큰일낼 편지가 있답니다. 어째 한 조각도 안 남았어. 죄다 아궁이에 들어갔나 온. 이런 데 한 조각 남아 있으면 작히나 좋아. 옳다, 여기 하나 있다!”

하고 순이가 종이 조각 하나를 얻어들고 후후 먼지를 분다.

“찾었니?”

하고 한갑 어머니가 염려가 놓이는 듯이,

“어디 나 좀 보자.”

하고 고개를 내민다.

“자요.”

하고 순은 불규칙으로, 사각형으로 찢어진 종이조각 하나를 한갑 어머니 눈앞에 갖다 댄다.

“거기 무에라고 썼는데 그렇게 야단이냐. 어디 좀 읽어보아라, 넌 글 알지, 내가 아니, 눈이 발바닥이지. 아무리 야학을 해도 모르겠더라. 바뱌버벼까지밖에는 더 안 들어가는 것을 어떡하니? 우리 아인 알지 - 그럼, 한갑인 진서도 알지. 아이구 이번 고등법원에서나 우리 아들이 무사히 될라나.”

하고 한갑 어머니는 우연히 일어난 아들 생각에 종이조각 문제는 잊어버리고 감자 껍데기만 득득 긁는다.

순은,

“여기 한 조각 있습니다.”

하고 부엌에서 얻은 종이조각을 정선에게 갖다 주었다.

“어디, 어디.”

하고 그 종이조각을 받았다.

그 조각에는 어느 글자의 변인 듯한 '言’자, '眞’자, '令’자, '閨’자의 한 편 귀퉁이 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글자가 누구의 것임을 정선은 곧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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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 2008년 5월 16 금요일, 0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