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ticle Ind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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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 (2-1) |
| 늦은 모내기 |
| 넋을 잃은 유순 |
| 누구 논인지 잊고서 |
| 관리에겐 복종하라 |
| 남녀유별도 모르오? |
| 달아나는 기수 |
| 세상이 변해서 그렇지 |
| 한갑이라는 청년 |
| 서울을 떠난 허숭 |
| 추악한 아내의 모습 |
| 순사의 폭행 |
| 나라 법이 그럴 수가 있나 |
| 초췌한 모습 |
| 나 먹을 건 부엌에 있지 |
| 여기서 살 겁니다 |
| 늙은 회나무에게 물어보라 |
| <한꺼번에 보기> |
2장
여울 보에 오래 기다리던 물이 늠실늠실 불었다. 삼사 일 이어 오는 비에 살여울 강물이 소리를 내며 흘러, 오랜 가물에 늦었던 모를 내게 된 것이다.
논마다 허리 굽힌 사람들의 움직이는 양이 보였다. 길게 뽑는 메나리 가락도 들렸다. 비록 배는 고프더라도 젊은이에게는 기운이 있었다.
아침나절까지도 비가 와서 부인네들은 삿갓을 등에 지고 모를 내었다. 그러나 인제는 비도 개고 파란 하늘조차 여러 조각의 흰 구름이 어울려 흥건하게 닿은 논물에 비치었다. 그래서 부인네들의 등에 졌던 삿갓은 논둑에서 노는 엄마 따라온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혹은 벌거벗고 혹은 적삼만 입고 혹은 고쟁이만 입은 사내, 계집애들은 물장난을 하고 소꿉장난을 하였다. 그들의 몸은 볕에 그을러서 검었다. 그러나 도회의 아이들 모양으로 기름기는 없었다. 기름기가 있을 리가 있나. 그들은 만주 조밥에 구더기 끓는 된장밖에 먹는 것이 없거든. 젖먹이로 말하여도 절반이나 굶은 어머니의 젖을 젖이라기보다는 젖 묻은 그릇을 씻은 물이었다.
다만 물과 일광만이 아직 불하, 대하, 공동 판매도 아니되어서 자유로 마시고 쬐기를 허하였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맘껏 볕에 그을고 맘껏 물배가 불렀다. 인제는 비가 와서 마른다 하던 우물도 물이 늠실늠실 넘었다.
모를 내는 여자들의 무릎까지 올려 걷은 다리, 그것은 힘은 있을망정 살이 비치는 흰 명주 양말에 굽 높은 흰 구두를 신은 그러한 서울 아가씨네 다리와 같은 어여쁨은 있을 리가 없다. 모내는 아씨네, 아가씨네 다리들은 띵띵 부었다.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너무 오래 물에 담겨서, 또 너무도 굶어서 부황이 나서. 만일 이 아씨네, 아가씨가 아픈 허리를 펴느라고 고개를 들고 두 손에 물이 옷에 묻지 말라고(젖을 옷도 없건마는) 닻가지 모양으로 좌우로 약간 벌리고 선다하면 그 얼굴도 - 일생에 한번밖에(그것도 시집 간 여자라야) 분 맛을 못 본 얼굴은 볕과, 굶음과, 피곤과, 너무 오래 고개를 숙임으로 퉁퉁하게 붓고, 또 찌그러져 보일 것이다.
땀과 때와 빗물과 흙물과 더위에 뜨고 쉬인 옷 냄새, 이 냄새가 농촌 모내는 사내의 코에는, 모기장 같은 상긋한 옷에, 불그레 뽀얀 부드러운 살이 비치는 서울 아씨네, 아가씨네의 몸에서 극성스럽게도 나는 향내와 같을 수 있을까.
늙은이도, 젊은이도, 여편네도, 처녀도, 한 손에는 못춤을 쥐고 한 손으로 두 대씩, 석 대씩, 넉 대씩 갈라서는 하늘과 구름 비친 물을 헤치고 말랑말랑한 흙 속에 꽂는다. 꽂은 볏모는 바람에 하느적하느적 어린 잎을 흔든다. 인제 그들은 며칠 동안 뿌리를 앓고 노랗게 빈혈이 되었다가 생명의 새 뿌리를 애써 박고는 기운차게 자라날 것이다.
그러한 뒤에 알을 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누렇게 익어서 고개를 숙여, 일생의 사명을 끝낸 뒤에는 아마도 모내던 손에 깎이어 알곡은 알곡 따로, 짚은 짚 따로 나고, 알곡은 - 아아 그 알곡은 모낸 이, 거두는 이의 알곡은 반은 지주의 곡간을, 반은 빚장이의 곡간을 다녀서 차를 타고 배를 타고 몇 상인의 이익을 준 뒤에 논바닥 물에 살은커녕 그림자 한번도 못 잠겨 본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는 밥이 되고, 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논바닥에서 썩는 이 생명들은 영원한 가난뱅이, 영원한 빚진 종, 영원한 배고픈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뻥’하고 고동소리가 들린다. 서울서 봉천으로 달아나는 기차다.
이 고동 소리에 모내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유순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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